여행을 좋아한다. 도시도 좋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도 좋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나왔다. 서점을 좋아해서 자주 가던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답사기는 항상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자리가 생기고 나서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번호를 달리하며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점은 좋아했지만, 그 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다. 경주로 갔었던 수학여행도 실은 여행보다는 답사에 가까웠지만, 그 시절 현장이든 책으로든 답사는 내게 단지 낡은 느낌의 그 무엇이었다.
그러다 처음 만난 유홍준 선생님의 책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 이었다.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하면서 사 두었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국내편들은 제쳐두고, 그 때 새로 나온 중국편을 먼저 읽었다. 중국에 관심이 많아서도, 중국 역사를 잘 알아서도 아닌데, 그때는 그 책이 눈에 들어 왔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세 권으로 이루어진 중국 답사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는 아마도 선생님의 글쓰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구어체도 아닌데, 뭔가 말로 전달되는 느낌의 생생함은 물론 문장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이 책은 매일 퇴근길에 듣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책 출판과 함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신 것 같았다. 말씀하시는 건 처음 들은 것 같은데, 유머가 섞인 힘있는 말투에서도 글과 같은 재미가 느껴졌다. 말씀 중에 책 내용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책을 읽고 싶게끔 흥미를 돋우어 주셨다. 바로 책을 구매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에서 서평단 이벤트를 진행하길래 응모했는데 운이 좋았다. 졸지에 두 권의 책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한 권은 선물을 해야겠다.
책은 선생님의 인생에 대한 소회가 담긴 느낌이다. 얼마전에 읽은 김훈 선생님의 <허송세월>과 왠지 모르게 닮은 듯 했다. 느낌은 많이 다르지만 말이다. 처음엔 제목이 너무 '답사기'에 인위적으로 맞춘 것 같았는데, 읽고 나니 인생의 소회를 답사하듯 풀어낸 것 같아 공감할 수 있었다. 인생의 소소한 것들부터 문화, 답사에 대한 이야기와 삶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선생님의 시대와 나의 시대가 같겠지만, 살아가는 나이대는 차이가 있다. 같은 시대를 다르게 살아가는 선생님과 선생님 주변 분들의 삶은 왜 나와 다른 것일까. 각자가 만든 자리가 있을 테지만, 그 차이를 단지 나이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남긴 것 같았다. 한 사회의 같은 구성원으로써 함께 살아가며 사회를 형성하고는 있지만, 선생님들은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키며 발전시켜 나간 반면, 나는 그냥 만들어준 그 사회에 순응하기만 한 기분이랄까. 뭔가 단조로워 보인다.
내가 현 시점에서 나의 인생을 답사한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 낼 수 있을까. 단조롭고 평범하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의 과거 어느 부분으로 돌아간다면 인생만사가 풍요로운 이야기들로 넘쳐 날까. 뚜렷하고 명확하게 어떤 시점들이 떠오르지도 않지만, 혹여 떠오른다 해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현재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 답사기는 과거가 아닌 만족스러운 현재를 기록하면 되는 거 아닐까. 직장에서의 소소한 스트레스와 성취, 가정이 주는 안락함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어렵지만 재밌는 시간들 말이다. 선생님 답사기도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이야기들을 현재에 풀어내면서 바로 지금을 특별하게 살아가는 이야기 말이다. 과거는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이고, 현재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재밌는 내용의 책이고, 생각거리가 많았던 좋은 잡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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